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칭의가 있는 곳에 성화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칭의와 성화는 함께 병행하는 평생의 과업이다.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칭의와 성화는 구분과 분리가 가능하지만 생애의 경험 속에서는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벌카워(G. C. Berkouwer)는 신학사에서 지금까지 계속되는 싸움들 중 하나는 칭의와 성화의 상대적 중요성에 관계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쟁론에서 한 쪽은 다른 쪽이 칭의를 성화에 흡수되게 만든다고 비난하고, 그에 대해서 다른 쪽은 그 쪽이 오로지 칭의에만 과도하게 몰두한 나머지 성화를 쫓아낸다고 맞받아친다.’--그 문제를 제기한 후, 벌카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화에 관하여 말함이 없이 칭의에 관하여 말할 수 없으며, 칭의에 관하여 말함이 없이 성화에 관해서도 참으로 말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G. C. Berkouwer, Faith and Sanctification, p. 9; 조지 R. 나이트, 21세기 재림 신도의 성화와 완전, p. 109).
제임스 데니(James Denney)는 그 요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칭의와 성화의 구분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이다. 화목되고 의롭게 된 사람의 생활이 불가피하고 자연스럽게 거룩한 생활로 되지 않는다면, 칭의니 화목이니 하는 것이 기만이라는 사실을 가끔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이 두 가지 측면은 그리스도께 대한 나뉠 수 없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영혼의 반응이다”(James Denney, Christian Doctrine of Reconciliation, pp. 297, 300; 조지 R. 나이트, 상게서, pp. 109, 110).
16세기 종교 개혁자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의롭다고 해 주시는 사람치고 그분께서 동시에 거룩하게 해 주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피력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처음 몇 장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다룬 다음, 뒤의 장들에서는 성화된 삶을 살도록 강조하고 있다. 바울의 강조점은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의롭게 되고, 거듭나게 되고(초기 성화되고), 점진적으로 성화되고, 완전케 되어가는 중에 있다는 것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요,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자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계속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질 때만,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화된 성품이 이루어지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께로부터 끊임없이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아 점진적으로 자라나 성화된 품성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1. 성화의 의미
성화에 대한 바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성화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1) 성화란 거듭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초기의 성화는 곧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마음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의 방향이 거룩한 곳으로 바뀌는 경험이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곧 거듭남이다. 마음과 삶의 방향을 매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매일의 거듭남이다. 마음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그 새로워진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2) 성화란 마음속에 거룩한 성품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거듭남은 갓 태어난 신생아요, 성화는 지속적으로,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완숙한 성품의 열매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이 성화이다. 그때에 성령의 열매가 성품 속에 맺혀지게 된다(갈 5:22, 23).
“생명이 그러한 것처럼 자라남도 또한 그러하다. 꽃봉오리를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씨가 발아하여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을 이루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모든 초목과 꽃들은 그것들의 염려나 걱정이나 노력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공급하시는 것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다.--초목이나 어린아이는 그들 주위에 있는 것들에게서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공급되는 것들, 즉 공기, 일광, 영양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다. 이 천연계의 선물들이 동물과 식물에게 관계되고 있는 그러한 관계가 그리스도와 그를 의지하는 자들 사이에도 똑 같은 것이다”(정로의 계단, pp. 67, 68).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날마다 받음으로 거룩함의 열매를 맺도록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바로 성화인 것이다.
(3) 성화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화로 나아가는 삶을 상징으로 잘 보여주는 의식이 침례의식이다. 침례의식은 어떤 면을 가르쳐 주는가?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옛 자아와 옛 생활방식이 죽는 것이요, 둘째로, 그리스도의 장사 지내심과 연합하여 옛 자아와 옛 생활방식을 물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이요, 셋째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새로운 자아와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부활하여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침례의식에는 뜻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롬 6:1-11).
이와 같이 성화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롬 6:6-11; 벧전 2:24). 의롭게 살아가려면 옛 사람, 옛 자아와 옛 생활방식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경험이 선행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롯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무엇 때문에 옛 사람, 옛 자아가 죽어야 하는가? 그것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8, 11)라고 말했던 것이다. 과거의 불의한 삶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서 의로운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의로운 삶은 의로운 성품에서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성화의 생애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전 것, 즉 옛 사람, 옛 자아와 옛 생활방식은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자아와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새롭게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화인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유전적으로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들과 후천적으로 배양된 악한 습관들을 죽이고, 거룩한 성품으로 점진적으로 성장시켜 나가는 과정이 곧 성화인 것이다.
(4) 성화란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의 품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여기에만 우리의 유일의 안전이 있다”(Review and Herald, 1900. 11. 27; 마라나타, p. 112).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심령이 성화되는 것은 인간 속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심어주는 것이다”(실물교훈, p. 384).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나에게 입혀주시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의 성품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게 가납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이요, 성화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나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칭의는 입혀주신 의요, 성화는 나누어 주신 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성화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성장하는 것인데,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하는 성품의 열매이다. 마음속에 심어진 새로운 영적 생명은 이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될 수 있도록 자라날 수 있는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분의 아름다운 생애와 성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나의 성품도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처럼 변화되기를 흠모하고 열망하게 된다. 그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내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형성되고, 그 성품이 습관화되고, 제2의 후천적인 성품으로 고정되는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의 후천적인 성품으로 고정되어 성화된 성품으로 완숙될 때까지의 성장 과정이 바로 성화인 것이다.
(5) 성화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자신의 성품 속에 받아들이고
거룩하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계시 중에 하나님의 보좌에 있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서로 창화(唱和)하는 소리를 들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하늘의 숯불로 정결케 됨으로 죄사함과 용서의 은혜를 입게 되었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다(사 6:1-5). 그 후로 이사야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열망은 깊어졌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자신의 생애 속에 아름다운 성품의 열매로 맺혀지기를 열망하게 되었다. 이것이 성화의 경험이다. 성화란 거듭난 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품성으로 계발시키는 것이며, 거룩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화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화된 사람만이 거룩한 하늘의 분위기에 조화되고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성화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품성을 이루는 것이다
“신의 성품을 나눠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의의 표준, 즉 그의 거룩한 율법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헤아리는 표준이다. 이것이 심판 때에 성품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상게서, p. 314).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다. 율법의 원칙과 정신이 나의 성품의 열매 속에 나타나는 것이 성화인 것이다. 진정으로 성화된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 그 율법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여주는 사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나의 성품 속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성화된 자의 성품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며,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성화된 자에게 약속하신 새 언약을 이루실 것이다.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생각에 심어지고 우리의 심비에 기록될 때,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성화된 성품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2. 성화의 중요성
(1) 성화는 칭의의 열매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 개인의 생애 속에서 칭의의 경험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입술의 공언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열매로 입증되는 것이다. 성화의 열매가 없는 칭의는 참된 칭의가 아니라 입술의 공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칭의의 경험 속에는 반드시 그 열매로 성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2)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칭의와 성화는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만나는 순간부터 그의 생애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경험이요, 함께 병행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가 없는 성화가 있을 수 없고, 성화가 없는 칭의가 있을 수 없다. 칭의와 성화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분명히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칭의나 성화 중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거나 배제시켜 버리는 것은 비 성서적이다.
(3) 성화된 자의 심령은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산 성전이기
때문에 성화는 중요하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씻음을 받고 용서받은 영혼들이 거룩하게 변화됨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산 성전(living temple)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우리 속에 성령께서 거침없이 거하실 수가 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고상하고 귀한 특권인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이러한 고상한 개념을 가질 때 우리가 보고, 듣고, 읽고, 먹고, 마시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거룩한 결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거듭나고 성화된 심령은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산 성전이요 처소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 성령 하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는 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4) 성화는 하늘나라에 적응할 수 있는 적합성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칭의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증(the title to heaven)이요, 성화는 하늘나라에 적응할 수 있는 적합성(the fitness for heaven)이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죄악된 습관을 그대로 지닌 죄인이 설령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용납되어진다 할지라도 그 거룩한 하늘나라 분위기에 결코 적응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는 그곳이 도리어 지옥이 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룩하게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점에 있는 것이다.
거듭남으로 새로 태어난 신생아들에게는 새 마음이 주어진다. 그 출생이 있은 후에 그 사람은 하늘에서 적응할 수 있는 “적합성”을 길러나가는 일, 즉 성령의 능력을 부여받아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일(점진적 성화)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내면화 시키는 일, 즉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품성과 조화되지 못하면 하늘의 분위기에 결코 적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성화를 이루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5) 성화는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9, 10).
“하나님의 형상대로 이루어진 품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다.--그런즉 현세에서 우리의 품성을 계발하여 닦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수 없다”(실물교훈, p. 332).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재창조하기 위하여 오셨다”(시대의 소망, p. 478).
“사단은 사람이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저하시키는 일에 성공한 것을 심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조물주의 형상을 사람에게 회복시키려고 오셨다.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품성을 다시 새롭게 형성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었다. 그는 사람의 의지를 지배해 온 악마들을 쫓아내시려고 오셨다. 그는 우리를 진토에서 건져내어 손상된 품성을 당신의 거룩하신 품성을 따라 재형성하시고 그 품성을 당신의 영광으로 아름답게 만드시기 위하여 오셨다”(상게서, p. 37, 38).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목적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의와 공로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심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목적인 것이다. 성화란 우리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6) 성화는 최후의 선악간의 대쟁투에서 하나님을 옹호해야 할
마지막 세대의 필수 자격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각 시대마다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 가운데 그 성화의 정도와 분량은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받은 빛에 따라 그들은 성화의 열매를 맺은 자들이다. 그런데 특별히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세대들에게만은 하나님께서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높은 성화의 표준에 도달하기를 원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히 죽음을 맛보지 않고 구원함을 받을 마지막 시대의 특별한 무리인 144,000은 그들의 성화된 품성의 열매로 온 우주 앞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율법을 옹호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타락한 인간의 생애 속에서 최종적으로 어떠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그들의 생애와 품성을 통하여 온 우주 앞에 분명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특별한 무리가 144,000이다(계 14:1-5). 이 특별한 무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을 옹호할 마지막 세대”라고 부른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율법을 옹호하게 될 것인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 사단은 온 우주의 거민들 앞에 다음과 같은 거짓된 논조를 주장해 왔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만들어 놓고 결과적으로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하시며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거짓된 논조를 주장하는 사단을 하나님은 당장 멸망시킬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지금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사단의 주장이 거짓된 것임이 온 우주의 거민들 앞에 명백하게 증명되기 전에 사단을 멸망시켜 버린다면 온 우주의 거민들은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섬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은 영원히 곡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단을 아직까지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누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가?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의 씻음을 받고, 의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온전히 성화되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된 자들, 곧 144,000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러한 특별한 무리가 마지막 세대 가운데서 나타나게 될 때 하나님은 이 땅에 대 환란을 허락하실 것이다. 늦은비의 능력으로 인침을 받은 144,000은 이러한 혹독한 시련과 환란 속에서도 그들의 변화된 성품은 변질됨이 없이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과 온전히 일치되는 성품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혹독한 대 환란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은 온 우주의 거민들 앞에 다음과 같이 전시(demonstration)하실 것이다. “자, 여기에, 나의 율법을 그들의 생애와 품성을 통하여 온전히 순종한 자들이 있노라”고.
이제 그들의 성품의 열매는 하나님의 율법과 온전히 일치되는 성화의 완숙된 열매가 맺혀져 있음이 입증되는 순간, 온 우주의 거민들의 의문은 완전히 해소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찬양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화된 성품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율법을 온 우주 앞에 옹호함으로 사단의 논조가 거짓임을 폭로시킬 사명을 가진 특별한 무리가 144,000이다.
우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구성의 인간들을 구원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입장을 거짓된 사단의 참소로부터 깨끗하게 증명되는 일이다. 이러한 사명을 마지막 세대인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것은 얼마나 고귀한 특권인가! 이 사명은 하늘의 천사들도 감당할 수 없는 성스러운 특권이다. 특별히 지구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은 그 어느 시대보다 가장 고귀한 것이다. 이 고귀한 사명을 누가 이루게 될 것인가?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으로 온전히 성화된 자들을 통하여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와 성품 속에서 성화의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3. 성화된 품성의 표준
하늘에 가서도 우리의 품성은 계속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품성의 목표이다.
(1) 우리가 도달해야 할 품성의 표준은 무엇인가?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신의 성품을 나누어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의의 표준, 즉 그의 거룩한 율법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행위를 헤아리는 표준이다. 이것이 심판 때에 품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실물교훈, p. 3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온전하게 되기를 요구하신다. 그분의 율법은 그분의 품성의 사본인 동시에 모든 품성의 표준이 된다.--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가지게 될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상게서, p. 315).
우리가 도달해야 할 품성의 표준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다. 그러므로 신의 성품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 되는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고 일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이 그의 성품의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2) 우리가 도달해야 할 품성의 표준을 어떤 여러 가지 용어들로 표현하고 있는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품성의 표준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표현된 용어는 다르지만 경험은 동일한 것이다.
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② 온전하게 되는 것
③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으로 변화되는 것
④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
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
⑥ 성화되는 것
이 모든 표현들은 한가지로 동일한 경험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품성의 표준이다.
4. 성화를 이루는 과정
어떻게 성화될 수 있으며, 어떻게 성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성화를 이루는 과정에는 인간이 해야 할 역할과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분명하게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1)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의 은혜를 입을 때 성화의 생애가 동시에 시작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 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씻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의 생애 속에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로,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이제는 너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는 것이다. 넷째로,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하여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 곧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결과적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무엇인가? 이것이 곧 성화의 열매인 것이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곧 성화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생애 속에 반드시 맺혀지는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의 은혜를 입은 자는 동시에 성화의 생애가 시작된다.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칭의와 성화는 평생 동안 함께 병행하는 경험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칭의와 거듭남과 성화의 경험에 대하여 논쟁을 벌여왔다. 이러한 논쟁이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개념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인 생애의 경험에서는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일어나는 경험이기 때문에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다. 참된 칭의의 경험을 하는 순간 거듭남과 성화의 경험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늘 우리 주변에 떠돌고 있는 회개의 열매가 수반되지 않은 입술의 공언만으로도 칭의가 성립된다는 잘못된 칭의의 개념이 아니라,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가 수반된 참된 칭의의 경험에는 동시에 거듭남과 성화의 생애가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라는 우산 밑에는 입혀주시는 의 곧 칭의와, 나누어 주시는 의 곧 성화가 함께 병행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입혀주시는 의 곧 칭의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증이요, 나누어 주시는 의 곧 성화는 하늘나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적합성이다.
(2)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어질 때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진리가 마음속에 심어져야 한다. 이 진리가 마음을 조절하고 애정을 통제하여야 한다. 온 품성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 쳐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일점일획까지도 매일 실천하여야 한다”(상게서, p. 314).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성령의 감화가 없는 진리의 이론만으로는 사람의 심령을 깨우치고 그 마음을 성화하게 할 수가 없다. 우리가 비록 성경이 명하신 말씀과 약속하신 말씀에 정통하였다 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의 영이 진리를 마음속에 깊이 깨닫게 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우리의 품성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실물교훈, p. 408).
성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으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고, 성화의 열매가 완숙되기까지 계속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감동과 역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우리의 골수와 양심을 찔러 쪼개며, 우리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여 우리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성경구절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 심령에 깊이 심어질 때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하며,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성령의 지도와 감동하심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하며,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에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라고 간구하신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인간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성화의 경험은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깊이 심어졌을 때에 일어나는 경험이라는 점이다. 성령의 역사가 수반된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다.
(3) 마음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순종할 때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진리를 순종하지 않고는 진정한 성화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사랑할 것이다. 성화된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이 주는 교훈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데 그것은 그 교훈들이 거룩하고 공의롭고 선하기 때문이다”(성화된 생애, p. 67).
그러면 우리는 마음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의 의지는 너무나 연약함으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시킬 때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고 도와주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우리 속에 두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기꺼이 행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하게 될 때에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 중의 하나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굳게 연합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강화시켜 주시고 우리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즐겨 순종하도록 힘을 주시고 도와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는 사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권세는 곧 하나님의 권세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때에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실물교훈, p. 314).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즐겨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다. 사람이 성령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특권인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강화시켜주시고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가지게 될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상게서, 3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되며 완숙된 단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성장하게 된다. 성화의 열매가 완숙되는 과정은 일평생의 과업인 것이다.
(4)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3-5).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감동하실 때에만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에 감격과 감동과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구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처럼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체험할 때 우리의 심령 속에 진정한 회개와 자복이 일어나며, 전적으로 헌신하는 마음과, 칭의와 거듭남과 성화의 경험으로 계속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깨닫고 체험하느냐의 여부에 좌우된다. 여기서부터 신앙은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것만큼, 우리의 품성은 변화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체험하기 위해 말씀을 연구해야만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기 위해 갈구하자.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도록 하자.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열망이 되도록 하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5)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품성은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으로 변화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중심이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믿음의 모본과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바라볼 때 우리의 품성은 그분과 같이 변화되는 것이다.
“바라보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라보다”라는 단어는 영어로 “behold”인데, 이 말의 뜻은 “시각이나 이해를 통해서 깨닫는 것, 또는 응시하고 관찰하며 주목하는 것”(Webster’s New Collegiate Dictionary, p. 101)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라보다”라는 말의 의미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마음으로 사모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는 것, 흠모하고 모방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가 “바라보다”라는 말속에 담겨진 뜻이다. 어떤 대상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흠모하며명상할 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바라봄으로 변화되는 법칙이라고 부른다.
바라봄으로 변화되는 법칙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p. 478).
행동 심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는 것에 따라 생각은 형성되며, 생각은 행동을 이루며, 행동은 습관을 이루고, 습관은 제2의 후천적 품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청소년들의 마약, 폭력, 살인, 성폭행, 강도, 총기 사고 등등 걷잡을 수 없는 범죄의 가장 큰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최근 미 연방 정부에 제출된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아동들은 5살에서 14살까지 자라오는 과정에서 평균 13,000회에 달하는 살인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하여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청소년들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폭력과 살인 장면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성장해 왔다. 그들의 첫 교사는 그들의 부모나 학교 선생이 아니라 바로 텔레비전이었으며, 그 교육 내용은 악한 생각을 형성하는 나쁜 장면들이었다. 다음의 영감적인 말씀을 깊이 음미해 보자.
“지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 똑같이 바라봄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상게서, p. 555).
그러므로 무엇을 바라보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흠모하느냐, 무엇을 배우고 모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상, 행동, 습관, 품성은 형성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그 품성도 그대로 변화되는 것이 바라봄으로 변화되는 법칙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의 품성은 누구처럼 변화되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계속적으로 바라볼 때,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명상할 때, 그리스도를 흠모하고 배우고 모방할 때 우리의 품성은 그리스도의 품성처럼 변화될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그들은 그분의 형상으로 꼴 지워지게 될 것이다. 바라봄으로 그들은 거룩한 모본으로 변화하게 되며, 그들의 품성은 부드럽게 되고, 세련되며, 천국에 합당하도록 고상하게 된다”
(교회증언, 4권, p. 616).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의 품성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과 같이 형성된다. 우리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사랑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명상할 때에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생각 가운데 자리 잡게 된다.--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한 형상,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된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pp. 388, 389).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변화된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인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변화된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 요한이다. 변화되기 전 사도 요한은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요한은 본성적으로 해로운 품성의 결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곧 그는 자만스럽고, 야심적이었으며, 화를 잘 내고, 남을 멸시하기를 잘 하고, 남에게 곧 잘 해를 끼쳤다”(성화된 생애, p. 54).
이렇게 결함이 많은 사도 요한이었지만 그는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기를 좋아했으며, 그리스도를 늘 바라보고 모방함으로 놀랍게 변화되었다. 변화된 후 사도 요한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요한은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변화시키는 감화 아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자아는 예수님 안에 감추어졌다. 그는 살아계신 포도나무와 밀접히 연결되어 신의 성품의 참여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되면 언제나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성화이다”(상게서, pp. 54, 55).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변화되는 법칙은 품성 변화의 절대적인 법칙이다.
(6)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시킴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며 행군이다. 그러나 얻어야 할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싸움의 장소는 곧 마음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인류가 지금껏 싸운 가장 큰 싸움은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곧 마음을 사랑의 주권에 바치는 것이다.--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동의와 협력이 없으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가 없다.--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에 억지로 협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산상보훈, pp. 141, 142).
“그들의 의지는 그분의 뜻에 굴복시켜야만 하며, 그들은 그분의 영과 더불어 활동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사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이 아니요 그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상게서, p. 94).
그러면 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켜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허락이 없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코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성령께서 우리의 의지를 온전히 주관하시도록 우리 자신이 먼저 허락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바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뜻을 품고 행동하게 해주신다. 이리하여 우리의 전 인성이 완전히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의지력을 바르게 행사함으로써 생애의 전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의지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하게 된다”(절제생활, pp. 112, 113).
“그대가 할 일은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 편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복종시킬 때 그분은 즉시 그대를 취하여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행하도록 그대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대의 본성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대의 생각까지도 그분께 복종하게 된다.--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때 그대의 생애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다. 그대는 모든 정사와 권세보다 우월한 능력에 연합하게 된다. 그대를 하나님의 능력에 굳게 매어 둘 힘을 그분께로부터 받게 되고 새로운 생애, 곧 믿음의 생애가 가능케 된다”(상게서, pp. 113, 114).
그러면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다.
② 우리의 본성이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③ 우리의 전 인성이 완전히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④ 우리의 생애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지게 된다.
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하게 되고, 그분께로부터 힘을 받게 된다.
⑥ 새로운 생애, 곧 믿음의 생애를 가능케 하도록 도와주신다.
⑦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도록 도와주신다.
⑧ 생애의 전적인 변화를 일으키도록 도와주신다.
예를 들어보자. 육적인 자아가 화를 내고 싶은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바로 그때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시킴으로 성령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감정을 조절하도록 도와주심으로 승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육적인 자아는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싶지만 바로 그 순간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나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 성령께서 도와주심으로 침묵을 지키게 해 주신다.
우리의 모든 실패의 원인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하지 못하고 육적인 자아를 의지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하기만 하면 그 다음의 일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도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싫어하는 것일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도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미루고 있는가? 성령 하나님께서 온전히 나를 주관하시도록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키자. 성령께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언행을 송두리째 주관하시도록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자. 다음의 영감적인 진술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상을 제공해 준다.
“아무도 (자아와 죄를) 극복하는 위대한 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 것도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지 말게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협력 없이는 인간을 위하여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역사하시지 않는 한, 우리들은 매 발자국 마다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으며 무가치한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와의 협력만이 승리를 의미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81).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킴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7)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자신의 결점을 고치려고 자아와 더불어 싸울 때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사도 바울은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했으며, 날마다 자아가 죽는 경험을 가졌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자신의 결점을 고치려고 자신과 더불어 투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품성을 얻는 일이 쉬운 일이라는 보증을 주시지 않았다. 고상하고 모든 면으로 원만한 품성은 선천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히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고상한 품성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통하여 개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품성은 자신과 더불어 맹렬히 싸움으로 형성된다. 선천적 성벽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투쟁을 계속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면밀히 비판하고 좋지 못한 성벽은 하나라도 고치지 않은 채로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나는 품성의 결점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하게 하지 말라. 만일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분명히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대의 의지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대가 하려고 하지 아니하면 이길 수는 없다”(실물교훈, p. 331).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수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자아와 싸우는 일을 등한시 하면서 거룩하고 고상한 성품을 우연히 얻으려고 기대한다면 참으로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자아와 더불어 싸우도록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아를 쳐 복종시킴으로, 날마다 자아가 죽는 경험을 통해서 성화된 품성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8)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죄와 더불어 싸울 때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4).
“죄를 이기려는 저들 자신의 결정적인 노력 없이 요행을 따라 품성이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자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p. 336).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는 심히 약화되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자아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한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강화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연약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될 때 그 의지는 강화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강화된 의지로 죄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죄와 싸울 때 거룩하고 고상한 품성은 형성되는 것이다. 성화된 품성은 요행이나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9)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의 정신으로 봉사할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0, 45).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의 정신으로 사심 없이 봉사할 때 우리의 이기심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며,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품성은 계발된다. 다음의 영감적인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복되게 하고자 하는 충동이 속에서부터 끊임없이 솟아날 때 달성 된다.--사랑과 동정의 충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고 향상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곳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실물교훈, pp. 384, 385).
참된 봉사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속에서 내가 기뻐할 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사심이 없는 봉사를 베풀 때 내 속에 있는 이기심은 자신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봉사의 기쁨에 동참하게 되며,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봉사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사람은 모든 인류의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이다”(사도행적, p. 13).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점을 기억하자.
(10)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 사업에 참여할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품성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목적을 이루실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은 품성을 계발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사업을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 곧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속량함을 받은 영혼들을 보는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저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p. 142; 그리스도인 선교봉사, p. 8).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간과 정력과 재능과 재물을 투자하여 복음 사업에 참여할 때 자연스럽게 이기심과 탐욕은 사라지고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이 계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을 천사들에게 위탁하지 않으시고, 연약하고 결함이 많은 인간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동정과 사랑이 충만한 하늘의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는 품성은 바로 이 땅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 동참할 때 계발되도록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것이다. 참으로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심이 없이 서로 사랑하며 봉사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하늘나라 사회에 결코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처한 환경과 여건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다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힘쓸 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게 축복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성화를 이루기 위해 이상의 몇 가지 역할들은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이다. 그 때에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화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등한히 하면서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될 것이라는 생각은 치명적인 오류임을 기억하자.
성화된 자의 특징들
이 문제는 성화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된다. 그러면 성화된 자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1) 성화된 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게 되었음을 확신하지만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더욱 더 자신의 불의함과 결점과 불완전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품성을 참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들이 죄 없다고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생애는 비난할 여지가 없을 것이며, 그들은 받은 진리의 산 대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따라 살기 위해 마음을 더욱 연마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에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뚜렷이 흠 없는 완전함을 분간할 것이며, 더 깊이 자신의 결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성화된 생애, pp. 7, 8).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의 씻음과 용서함을 얻고, 아름다운 성화의 열매들이 맺혀져 있음을 알 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 깊이 자신의 불의함과 결점과 불완전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역설적인 경험이다.
(2) 성화된 자는 자신이 성화되었다거나, 자신이 죄가 없다거나,
완전하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그들이 아직도 거룩하게 되기에는 멀었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상게서, p. 8).
“참으로 성화된 자들은 모두 다 이와 같은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과 완전하심에 대해 보다 명확한 견해를 가질수록 그들은 더욱 더 생생하게 그들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죄 없는 품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 안에서 올바르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이 그리스도의 순결함과 영광과는 대조적으로 가치 없고 부패한 것으로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성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을 때에,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갖지 못하였을 때에 하는 말이다”(상게서, p. 50, 51).
“요한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해서 가장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생애 중의 하나였다. 그 사도는 그의 구주를 너무도 친밀히 따르며 그리스도의 순결함과 고귀한 거룩함을 깊이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품성은 대조적으로 불결하게만 보였다. 구주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런 느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이 더욱 더 자세히 예수님의 생애와 품성에 대해 명상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자신의 죄를 느끼게 될 것이며, 조금도 그들의 마음이 거룩하다고 주장하거나 그들이 성화되었다고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상게서, p. 79).
(3) 성화된 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만을 끊임없이 신뢰한다
“그분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런 일이 마음 가운데 일어날 때에 우리는 자신이 의롭다는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만을 높이고, 우리의 무력한 영혼은 그분의 공로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상게서, p. 8).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로 거듭나는 경험 속에 살아갈지라도 끝까지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며, 우리가 이제는 의인이 되었다고 자랑할 것이 못된다. 그 이유는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자신의 의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스러움과 허물과 결점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만을 굳게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한 개인의 생애 속에 거듭남의 경험이 계속 유지됨으로 성화되었다 할지라도, 인간 본인 자신은 하나님 앞에 불의함과 불완전함과 결점을 더욱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성화되었다고 결코 자랑할 수가 없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그를 의롭게 해주시며, 성화의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와 은혜만을 믿음으로 굳게 의지한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성화된 자라고 평가하신다. 이것이 “역설적인 경험(paradoxical experience)”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칭의와 성화는 병행하는 것이다. 성화되면 될수록 자신이 성화되었다고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와 은혜만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자랑거리는 자신이 얼마나 거룩하게 성화되었는가가 아니라, 값없이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와 은혜만이 영원히 찬양과 노래의 주제가 될 것이다.
(4) 성화된 자는 습관과 성향이 성령의 열매와 일치하기 때문에 선행의 열매들이 맺힐지라도 그 선행을 두드러지게 의식하거나 과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선행에 주의를 끌려고 애를 쓰며, 끊임없이 자기들의 죄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신앙적인 업적이 눈에 띄도록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상게서, p. 12).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건강한 사실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의식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지도 않으며,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처럼 성화된 자는 자신의 습관과 성향이 성령의 열매와 일치하기 때문에 그의 생애는 성령의 열매들이 맺혀지고 있지만 그는 그 선행을 두드러지게 의식하거나 과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의 선함과 경건을 의식하지 못한다. 신앙적 원칙이 그의 생애와 행동의 동기가 되며 그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무화과를 맺으며, 장미 덤불이 장미꽃을 피게 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그의 감화를 받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그리스도인적 생활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인식하게 되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감화가 그의 습관과 성향에 일치하기 때문이다”(성화된 생애, p. 13).
(5) 성화된 자는 자신의 견해를 표준으로 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표준으로 삼는다
“참된 성화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반역적인 생각과 감정은 극복되고 예수님의 음성은 전신에 미치는 새 생애로 각성시킨다. 진실로 성화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옳고 그름의 표준으로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상게서, p. 9).
성화된 자는 자신의 견해에 하나님의 말씀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자신의 견해를 일치시킨다. 절대적인 원칙은 그 어느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만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다.
(6) 성화된 자는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원칙에 의존한다
“성경상 성화는 강렬한 감정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오류에 빠진다. 그들은 감정을 척도로 삼는다. 행복감을 느끼거나 감정이 고조될 때 그들은 성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행복감 혹은 우울감은 사람이 성화되었다거나 성화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상게서, p. 10).
많은 사람들이 이점에서 실패한다. 그들은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영적 체험으로 착각하는 과오를 범한다. 성화된 자는 자신이 느끼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에 믿는다.
(7) 성화된 자는 죄를 죄라고 부르며 죄를 미워하게 된다
“그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죄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과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화된 자는 죄를 죄라고 부르며, 죄를 미워하게 된다. 성화된 자는 죄를 옹호하거나 변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요인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화된 자는 죄를 동정하거나 옹호하지 않으며,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8) 성화된 자는 특별히 온유의 열매를 맺는다
“성화의 가장 고귀한 열매는 온유의 은사이다.--그리스도의 학교에 있어서 온유는 두드러진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온유는 성령께서 성화된 자에게 주시는 한 은사이며 온유함을 지닌 사람은 어느 때나 충동적이고 성급한 성벽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상게서, pp. 14, 15).
성화된 자가 왜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가? 과거에는 자신의 재능과 능력으로 무슨 선한 일을 이루는 줄을 알고 자랑했지만,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부터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가 나의 소망이요 생명이요 구원임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게 되고, 온유해질 수밖에 없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굳게 붙드는 자는 자연스럽게 온유의 열매를 맺게 된다.
(9) 성화된 자는 식욕과 생활 습관을 건강 법칙과 절제의 원칙에
조화되게 일치시킨다
성화된 자는 몸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고귀하게 여긴다.
•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17).
• 우리 몸은 하나님의 소유이다(고전 6:19, 20).
• 우리 몸은 거룩한 산 제물이다(롬 12:1).
이 얼마나 고상한 개념인가! 성서적 성화의 개념은 전인적 성화를 뜻한다. 육체를 제외한 영적, 도덕적 성화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여기에 육과 영이 언급되어 있다. 참된 성화는 육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거룩함을 따르는 삶이다. 참으로 성화된 자는 식욕과 생활 습관을 자연법칙과 건강 법칙에 조화되게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성화된 자는 모든 일에 절제의 원칙을 따르게 된다. 즉 성령의 최종적 열매가 되는 절제(갈 5:23)의 열매가 성화된 자의 생애에 맺히게 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것이 성화된 자의 생애의 원칙이 된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성화와 절제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풍조가 편만하다. 건강법칙을 강조하는 신자들은 마치 옹졸하고 극단주의자들인 것처럼 폄하하는 신학풍조가 너무나 편만해 있다. 이러한 신학 풍조와 사조에 동조할 필요가 없다. 성화의 모본으로 여겨지는 다니엘의 생애는 철저한 건강 법칙과 절제의 원칙에 성실하였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 자신의 연약성 때문에 내가 절제의 원칙을 고수하지 못한다고 해서 절제의 원칙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정신과 태도가 아니다. 진리는 나의 개인적 견해와 전혀 관계없이 언제나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건강과 절제의 원칙에 충실한 자들은 그만큼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축복을 받을 것이다. 진정으로 성화된 자는 우리에게 건강의 기별을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한다. 참으로 성화된 자는 자신의 식욕과 생활 습관을 건강 법칙과 절제의 원칙에 일치시킨다.
(10) 성화된 자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갈구한다
“즉각적인 성화란 있을 수 없다. 참된 성화란 생명이 유지되는 한 계속되는 매일 매일의 과업이다. 매일의 유혹과 더불어 싸우며, 자신의 죄된 성향을 극복하고, 또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구하는 자들은 성결하다고 하는 자만스러운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한다”(상게서, p. 10).
성화된 자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며 목말라 갈구한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가 아니면 그 어느 인간도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기 때문에, 더욱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며 목말라 갈구하게 된다. 즉 자신의 성품 속에 그리스도의 의가 성품의 열매로 완숙되기를 끊임없이 열망하고 추구하게 된다.
(11) 성화된 자는 어느 지점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완전함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참으로 성화된 자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한다.
“참된 성화란 생명이 유지되는 한 계속되는 매일 매일의 과업이다”(상게서, p. 10).
“성화는 한 순간, 한 시간, 하루에 이루어지는 과업이 아니라 일평생의 과업이다”(사도행적, p. 560).
“생명이 존속하는 한, 나는 충분히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멈출만한 어느 곳이나 어느 지점도 없을 것이다. 성화는 일평생 동안의 순종의 결과이다”(상게서, pp. 560, 561).
참으로 성화된 자는 결코 어느 지점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일평생 동안 완전함의 목표,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게 된다. 다음과 같이 사도 바울의 고백은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나는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거룩한 성품의 열매를 맺으라”는 주제를 연구해 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형벌과 권세에서 구원해 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은 우리로 거룩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와 은혜와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거룩한 성품의 열매, 즉 성화의 표준에 도달함으로 하늘나라 사회의 분위기에 조화되고 잘 적응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구원의 경험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며 함께 병행하는 경험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for us) 행하시는 역사이며,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in us) 행하시는 역사이다. 칭의나 성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공로가 인정되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칭의와 성화, 둘 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와 능력에서 기인된다. 우리는 일평생 동안 매일의 경험에서 칭의와 성화의 경험이 필요하다. 칭의와 성화는 인간의 구원의 경험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필수 요건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거룩한 성품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와 존귀를 돌리자.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계 5:13). 아멘.